사랑해 너무 늦어서 미안해

<십키로그램짜리 배낭 하나> 저자 민재하

완전히 나를 지킨 채 나의 시선과 마음을 최대한 짙게 쏟으며 머물고 싶은 전시가 있다면, 입장하기 전 탈의실에 ‘나’라는 사람은 그림자까지 남김없이 벗어두고 끝을 모른 채 작가에게 이입되고 싶은 전시가 있다. 봄기운이 넘실대던 4월의 끝자락, 초행길이었음에도 지도보다 동네 구석구석에 끊임없이 눈길을 빼앗겼던 북한산 끝자락에 위치한 콜드슬립에서 열린 곽비누 작가의 제로 베이스가 바로 그랬다. 미지의 생각이 발발한 영의 방을 마음껏 유영하는 영靈이 되길 바라며 치밀하고 유연하게 구축해놓은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이러한 전시를 쌓아 올린 작가의 영靈에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영과 비누에게 흠뻑 적셔지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던 그곳에서 나와 있는 지금, 그 때의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곽비누의 언어¹를 빌리고자 한다. 비누의 언어가 제로 베이스의 모국어라 생각하고 그 세계의 언어만이 전할 수 있는 미묘하고도 세심한 감정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로써의 ‘누구’가 아닌 이름으로써의 누구’로 입장한 세계에서의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일 때가 있기 때문에 ‘너’ 또는 ‘그’라고 불러도 무방한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누구를 너로 그로 우리로 명명해도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관객’ ²은 자유로운 유영을 결심할 수 있다. 그렇게 누구나가 될 수 있는 나는, 나도 될 수 있는 누구가 되어 누군가의 흑백 영화를 찢고 들어간다. 흑백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문득문득 색이 보이는 듯한 착각을 하곤 했다. 영화란 걸 보다 보면 자주 나는 바깥에 머물고 싶지 않아졌고, 홀로 여기 있는 것이 외로워서 모두가 있는 저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비누의 전시는 그 자체가 한 편의 흑백영화였다. 어두컴컴한 전시장에 입장하면 조그마한 손전등을 쥐게 된다. 흑과 백으로만 보이던 세계를 비추는 손전등은 나의 시선이자 내가 갈구하는 저 세계의 진실이다. 작가는 알고 싶어 하는 나의 갈망을 정확히 건드렸고 나는 지칠 줄 모르고 어둠을 긁어 색을 발견했다. 언제나 관념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던 ‘영화 속으로 들어가기’를 곽비누의 전시를 통해 처음 물질의 세계 속에서 경험했고 이 체험은 나의 관념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 전시 공간을 잠영하는 내내 함께 헤엄치던 잊히지 않는 장면들은 ‘모든 색이 되어 누구(인 나를)를 관통’했다. 누구(나)는 흰색이 되었다가 검은색이 되었다가 모든 꽃의 색이 되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색이 되’³어, ‘무’가 되어, ‘0’이 되어, 영靈이 되어 영의 방을 독차지했다. 작가의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가 설계한 세계를 점유해버릴 수 있도록 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이자 대단히 치밀한 의도란 생각이 든다.

전시의 마지막, 고심 끝에 선택한 결말의 대가로 주어진 영과 미지와 나의 결말을 받아 들자마자 가지지 못한 결말들에 아쉬움을 먼저 느낀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왜 ‘우리는 될 수 없는 것들만을 바라’는 것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앉아 내가 택한 우리의 결말을 읽고 나니 조금의 아쉬움도, 후회도 남지 않았다. 신기하리만큼 나와 닮아있던 글을 통해, 그리고 곽비누의 전시를 통해 비누를 알아가리라 다짐했던 나는 나를 알고 간다.

끝으로 ‘근사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너무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싶다’던 작가의 백 행 속 바람이 이루어졌기를, 그리하여 이토록 근사한 전시와 영화를 만든 비누가 불행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 작가의 책 조와 울들, 「미래파」 속 문장들을 인용할 계획이다.

2. 조와 울들, 「미래파」,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은 파티에 초대되고 말았어 中

3. 조와 울들, 「미래파」,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은 파티에 초대되고 말았어 中

4. 조와 울들, 「미래파」, 그리고 저는 시네필이 아닙니다 中

5. 조와 울들, 「미래파」, 백 행(2019)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