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사물

아레시보 기획자 박유진 Eugene Hannah Park @_ehpark


누군가를 기억하는 마음은 증거를 남긴다. 마음이 커진 밤에는 기억이 사물을 입고 그 안에 깃든다. 그렇게 여러 밤이 지나고 나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사물만이 그 자리에 남는다. 곽비누의 개인전 ≪ZERO-BASE≫는 기억의 초점이 흐려진 뒤 사물이 방의 주인이 되는 바로 그 시점에 주목한다.

전시는 영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름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나면 그 후에 우리는 대체>는 영과 미지가 함께 맞은 여름밤 중 하루를 보여준다. 영과 미지는 술을 마시며 영화와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좁은 입구에서 어깨를 잠시 맞댄다.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하는 듯 했지만 마지막에 남겨진 건 땅에 떨어진 타다 만 담배이다. 방 한가운데 자리하는 이 영상은 영의 시선을 가장 직접적으로 담고 있는 증거이지만, 이것이 방에 존재하는 모든 밤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없음과 혼을 동시에 뜻하는 ‘영’의 다단한 의미처럼, 기억은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기억은 하나의 시공간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방의 시간선에서 여러 사물들 간의 충돌을 일으키며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방은 다양한 사물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기록한 웹페이지, 해가 기울면 시드는 줄기가 긴 꽃, 무작위로 재생되는 자연과 군중을 기록한 영상, 익명의 플레이리스트, 책갈피가 꽂힌 열 권의 책, 이름 모를 물체를 찍은 엽서 등 사물과 마음의 관계망을 느슨하게 펼쳐내기 위해 작가는 방이라는 형태를 선택한다. 사물들의 배치와 배열 속에서 미지에 대한 생각은 어디에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

전시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시간을 선형적으로 포획하는 영상에만 의지하지 않고 다종의 사물에 초점을 둔다. 영상의 이야기 또한 이 방에서 사물의 일부이다. 여러 사물이 존재하는 가운데에 관객은 이 흔적을 더듬으며 각기 다른 여름밤의 상을 떠올린다. 사물을 들여다볼지 결정하는 것도, 사물을 관람하는 순서를 구성하는 것도, 영상의 결말을 선택하는 것도 관객의 자유이다. 사물은 슬그머니 영의 기억에서 빠져나오고는 각자의 밤에 익숙한 얼굴로 등장한다. 증거를 수집하여 기억의 궤적을 좇다 보면 관객은 여름밤의 뒤편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던 자기만의 방을 조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