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디 버드'는 러닝 타임 내내 소리를 지른다. 첫 키스를 한 날도, 엄마와 싸워서 마음이 답답한 날도, 대학 대기 명단에 오른 걸 발견한 때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어쩐지 명치가 답답했다. 이제 나도 다 커서 그런가. 그게 아니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레이디 버드가 부러워서 그랬나. 이유야 어쨌든 나는 레이디 버드가 미웠다. 그가 집안 사정은 생각도 않고 불평과 불만을 일삼아서 괘씸했다. 말도 안 되는 예명이 자신의 이름이라며 자기 삶의 주인이 오롯이 자기 자신임을 선포하는 그가 두려웠다. 왜일까? 그건 내가 속칭 ‘레이디 버드' 시절을 지나, 내 이름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이소라의 track9이 생각났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렸네.
그러므로. 알지도 못하고 태어나 원치 않은 이름으로 불린 까닭으로 사는 게 자주 내 뜻대로 안 되는 거라 여겼다. 세상이 나를 몰라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엄마와 아빠가 지어 준 이름 말고 내가 지은 이름으로 살고 싶었다. 비비안 마이어처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그 모든 것. 고향, 가족, 친구, 학교......, 그 모든 것을 떠날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싫어하는 것조차 관심에서 시작한다는 걸, 그때 우리는 몰랐다. 레이디 버드가 되어 훨훨 날아 지구 끝에 닿아도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고작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우리는 주어진 이름과 더불어 살 수 있다. 뉴욕으로 간 레이디 버드는 그제야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문제는 이름이 아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나'로 살기다. 우리가 자라서 겨우 우리가 된다*는 이 명쾌한 진리를 그레타 거윅은 <프란시스 하>부터 알았던 것 같다. X는 영화 속 크리스틴과 마리앤이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와 닮아 영화가 끝날 때 많이 울었다고 했다. 생각난 김에 전화했다가 괜히 싸웠다고도 했다. 그걸 말하는 그의 눈이 조금 축축해 보인 건 내 착각이었으려나. 그는 자신의 이름이 좋을까? 묻지 못했다. 나는 X의 이름을 좋아한다. 물론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김애란, <비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