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1986, 레오 까락스

이 영화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등장하는 순간 숨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 줄리 델피를 보고 말을 더듬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영화의 허들을 드니 라방으로 꼽은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레오 까락스의 최대 허들은 드니 라방이라고 생각해 왔다.) 영화는 시종일관 짙은 빨강과 파랑, 노랑을 오간다. 노란 라이더 재킷을 입은 알렉스는 파란 카디건을 입은 리즈를 떠나 빨간 카디건을 입은 안나에게 한눈에 반한다. 리즈의 사랑에 달리 덧붙일 말 없이 침묵했던 그는, 안나 앞에서는 정말 떠벌이가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씬은 냅킨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알렉스의 마술쇼를 보며 울고 웃는 안나의 눈이다. 영화는 컷을 점프해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고 유독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을 가까이 잡는다. 관객은 알렉스의 눈으로 안나를 본다. (물론, 이 영화는 과하게 안나를 대상화한다.) 당신이 안나와 순간 사랑에 빠져 영원을 믿고 싶어졌다고 해도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영화 속 세계에도 현실에서처럼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한쪽이라도 사랑 없이 섹스를 했다가는 STBO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만다. 외피는 누아르나 하드보일드를 표방하면서(난 사실 그런 게 뭔지도 잘 모르지만) 형형색색의 서정과 허황된 문장으로 도배된 레오 까락스의 세계가 보여 주는 것은 양방향일 수 없는 사랑의 불공평함이다. 내가 사랑하는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사실 사랑 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너를 지구 끝까지 쫓아가 봤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뿐이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나이보다 늙어 버린 우리는 사랑해서 외롭고, 사랑받지 못해 괴롭다. 그래도 어느 날은 또 누군가를 사랑해서 외롭고 싶어진다. 외롭혀 줘. 그걸 바라는 나쁜 피가,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